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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삶과문화』Vol.84 인문공간 <제주살롱>

No: 18

작성자: 경영기획실

작성일: 2023-12-29 16:47:14

조회수: 79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제주살롱 "
글 김영나(제주MBC 구성작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방학 때면 엄마는 늘 우리를 서점에 데려가 보고 싶은 책을 양껏 고르라 했고,
우리 삼남매는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양껏 챙겨와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읽나를 경쟁하며 책을 탐했다.
책읽기는 늘 신나고 즐거운 놀이였다. 그렇게 갖고 싶고, 보고 싶은 책이 많았던 시절과 달리
점점 쏟아져 나오는 책들 속에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무슨 책이 좋은지 선택하기 어려워진다.
책장 안에 빽빽이 꽂힌 책들, 책상 한 쪽에 자꾸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 책은 다 읽었나, 저 책은 언제 산 거지, 아 내가 저런 책을 샀던가. 이상하다.
어린 시절 읽은 책들은 제목과 내용은 물론이고, 주인공 이름까지 다 기억 한다.
요즘엔 며칠 전 읽은 부분을 다시 봐도 새롭고, 읽은 책이 기억나지 않아 버벅거릴 때가 더 많다.
더 이상 책읽기가 즐거운 놀이가 아니다.

내가 사는 제주에는 동네책방이 굉장히 많다.
여행객들은 동네책방 지도를 들고 제주도 전역의 동네책방만을 찾아다니는 투어를 한다.
책방 투어꾼들이 하나둘 늘면서 유명 관광지 못지않게 핫플레이스가 된 유명 책방들도 많아졌다.
나도 제주에 내려온 2017년부터 소문난 동네책방들을 하나 둘 찾아가봤다.
독특한 개성과 스타일로 꾸며진 동네책방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무척이나 쏠쏠했다.
책방투어는 여행객에겐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요소다. 하지만 책방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뭔가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느껴졌달까. 이건 뭐지..
분명 책방을 둘러봤는데 내 손에 들려온건 책 보단 굿즈가 더 많았다. 아, 이건 아니잖아.

그러다 만나게 된 동네책방이 한 곳 있다

제주의 동쪽지역인 구좌읍 송당마을에 자리한 인문공간 <제주살롱>. 큰 길 안쪽으로
낮은 돌담과 집들 사이에 햐앟게 보이는 3층 다락방이 있는 건물이다. 광고 일을 하던 남편과 다자이너 아내,
서울에서 내려온 부부는 북집사와 빵마담이라는 이름으로 서점과 북 카페, 북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인문공간 <제주살롱>, 인문예술이 담긴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책방 주인의 의도가 이름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이트와 블랙, 그리고 우드의 어울림이 인상적인 <제주살롱> 안으로 들어오면, 하얀 벽면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재미보다 의미’.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요즘에 재미보다 의미라니 너무 철학적이잖아.
눈에 띄는 위치에 진열된 책들을 보면 베스트셀러보다는 신간 위주의 국내 소설과 시, 해외 고전문학, 철학과 예술비평책들이 즐비하다.
책들 면 면을 보니 단연 재미보다 의미다. 제주살롱의 북 큐레이션은 북집사의 추천의 말이 책의 띠지로 둘러져 있다.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의 『예술과 풍경』이란 책에 대한 북집사의 추천의 글을 소개 해본다.
“현대 미술계의 대표적인 예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와 함께 하는 예술과 여행 이야기입니다.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의 세계를 여행이라는 흥미진진한 경험에 실어 재미있게 풀어 내는 이 책은,
고전과 르네상스 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 사진과 조형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전 세계를 누비며 그 놀라운 예술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마틴 게이퍼드가 전하는 예술의 아우라를 경험해 볼 수 있어요.”

<제주살롱> 북 큐레이션은 특정층을 겨냥하거나 테마 등으로 코너를 나누는 방식이 아니다.
북 집사의 감상평을 나눌 뿐, 책 선택은 오롯이 자신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책을 선택할지 고민도 깊어지고,
특히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한다면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망설이게 된다. 이럴땐 랜덤북이라는 블라인드 박스가 있다.
포장을 벗기기 전까지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는 호기심과 재미가 있지만 결국엔 의미로 다가오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는 거니까.
동네 책방 에디션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제주살롱>이고, <제주살롱>만의 에디션도 있다.

올해는 <제주살롱> 5주년을 기념해 특별한 기념 에디션을 제작했다. 북집사와 아내인 빵마담이 직접 책과 문장을 고르고 디자인했는데,
고전문학 작품을 10종 선정해 리커버 형태로 미술 디자인 5종과 타이포 디자인 5종으로 만들었다. 직접 보면 이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다.
예쁜 책은 늘 갖고 싶으니까. 그런 재미로 에디션을 소장하지만, 에디션을 보면 볼수록 책에 대한 북집사와 빵마담,
두 사람 의 애정과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더 의미 있는 특별한 책이 된다. 예쁜 책, 특별한 책, 나만의 책을 찾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재미에서 그치지 않고 더 큰 의미를 찾아가고 만나게 되는 곳이 책방 <제주살롱>이다.

그래서 책은 분명 ‘재미보다 의미’.

‘소유보다 존재’라는 두 번째 글귀에선 나의 책 욕심이 먼저 떠올랐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은 꼭 사서 읽어야 한다는 이른바 ‘책 부심’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읽기 위해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책을 모으는 데 급급해졌다. 쓸데없는 책 부심, 아니 책 욕심이 드글 드글해진 거다.

<제주살롱>은 서점이기도 하지만 북카페다. 한쪽 벽 전체를 책장으로 만들어 다양한 책들이 빼 곡히 채워져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여기에 꽂혀 있는 책들은 누구나 언제든 읽을 수 있다. 양껏 책 을 사서 내 것으로 만들면 괜히 부자가 된 것 같고 행복하다.
소유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책들 속에 있기만 해도 좋고, 책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곁에 있어 즐겁고,
책과 더불어 존재함을 기뻐 할 수 있는 곳이 책방 <제주살롱>이다.
많은 책방들이 책 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하는 북토크도 진행하고, 책방이라는 공간에서
영화,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과 이벤트 등을 진행한다. 책방은 더 이상 책만 있지 않고 책만 팔지 않는다.
다채로움을 연결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지역 커뮤니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네책방 이 책을 파는 것만으로는 수익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책방 생존을 위해서 필수요소가 된 지 오래다.

<제주살롱>에는 사람들이 있다. 소 수 멤버지만 심오한 철학책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북살롱은 예술가와 문인을 선정해 작가의 삶과 철 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다.
표 현주의의 거장 에곤 실레의 작품을 만나고,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가리나 헤르만 헤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부터 신인작가,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을 직접 만나는 북토크도 계속되고 있다.
<제주살롱> 북집사의 책에 대한 철학은, 단순하게 읽는 게 아니라 생활 로, 삶으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는 각자 읽는 행위지만 그걸 다시 말로 뱉어내다 보면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고,
같은 책이라도 나와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알게 되는 과정 에서 삶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도움이 된다.
혼자가 아닌 너와 내가 교류해야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의 힘이 커진다. <제주살롱>엔 책이 있고,
책이 있기에 사람들이 모인다. 그래서 책은 ‘소유 보다 존재’

더 이상 책읽기가 즐거운 놀이는 아니다

책읽기가 즐거운 놀이란건 어린 시절의 기억이고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추억은 희미해지려 할 때 내게 찾아 온건 책방이라는 놀이터.
어린 시절 신나게 타던 시소와 그네, 미끄럼틀, 친구들과 두꺼비집 만들 던 모래밭,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벤치까지, 웃고 떠들며 하루 종일 놀아도 즐겁기만 했던 동네 놀이터처럼
이제 나의 놀이터는 책방 <제주살롱>이다. 이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있을까.
여전히 난 재미있는 책을 찾으면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가끔은 양껏 책을 ‘플렉 스’하며 ‘책 부림’에 취하기도 한다.
동네책방이라는 놀이터에서 책을 벗삼아, 책으로 벗을 만들고, 책과 더불어 신나고 즐겁게 오래오래 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