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Vol.84 4·3소설 『제주도우다』의 작가, 현기영
- No
- 13
- 작성자
- 경영기획실
- 작성일
- 2023-12-29 16:44:10
- 조회수
- 75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글자 수 70만자, 200자 원고지 3,500매, 세 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창비)로 세상에 ‘백조의 노래’를 선사한 작가 현기영 선생.
가장 먼저 고향에서 출간 기념 북토크를 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선생을 지난 7월 8일 제주문학관에서 만났다.
그동안 눈썹과 수염, 머리칼이 좀 더 흰빛을 더 했을뿐 따스우면서도 형형한 눈빛과 조금도 서두르거나 힘들이지 않고
옛이야기 들려주듯 조단조 단 이어가는 말투는 여전하다. 4~5년 산고 끝에 나온 소설이라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에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4·3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다.”고 말문을 연다.
자연스럽게 그 사연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 “그간 중단편으로 4·3은 꽤 써왔으나 장편이 없었다. 언젠가는 4·3을 장편으로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배들의 몫으로 넘기고 나는 그만 쓰고 싶었다. 4·3을 벗어나 소위 보편주의 문학이랄까, 순(純)문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악몽을 꾸면서 다시 4·3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게도 4·3영령들이 내가 예전에
「순이삼촌」으로 정보기관에서 받았던 고문 방식 그대로 날 고문하는 악몽이었다.
‘아, 아직 벗어날 수 없구나, 제대로 진혼곡을 불러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4·3영령들께 바치는 공물(貢物)이자 진혼곡 (鎭魂曲)인 셈이다.”
위무가 필요한 대상이 어찌 이들뿐이었으랴. 3만 원혼을 진혼하는 것만큼이나 작가가 절실하고
절박하게 위무하고 싶었던 대상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살아 있는 죽은 자”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진혼곡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읽어 주기를 바랄까?
- “『제주도우다』는 4·3을 총체적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사실 4·3은 ‘수난’이면서 ‘항쟁’이기도 하다.
내가 써온 중단편이 주로 4·3의 ‘수난’을 다룬 것이었기 때문에 장편에서는 ‘항쟁’을 다루기 위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역사가는 사실(fact)에 기반한 인과관계로서, 이성적으로 4·3을 이해하겠지만
문학가는 사실(fact)을 진실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가에게 4·3은 3만 명이 희생당한 사건이지만
문학가는 4·3을 3만명의 생명이 스러진 3만 개의 사건, 3만 개의 개개인의 이야기로 본다.
문학가가 추구하는 것은 나열된 사실(fact)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다.
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방 속에서 거대한 코끼리를 만지는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
독자들도 그런 느낌으로 4·3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면서, 천천히 읽어주길 바란다.”
4·3의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마 젊은 세대를 향한 부탁은 아닐지.
소설 속에서 안창세 노인은 정부길 선생이 행방불명 되기 전 ‘살아 남아서 좋은 글을 쓰라’며
건네준 만년 필을 손녀 부부에게 전해준다. 세대전승의 상징인 셈이다.
어쩌 면 우리 모두에게 『제주도우다』 자체가 ‘만년필’은 아닐지.
“그렇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가 가장 강력하게 드 러나는 장치가 ‘만년필’일 것이다.
세대를 이어 기억이 전승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만년필에 담았다. 손녀 부부를 등장시킨 것도 이 소설의 전략이다.
조손(祖孫)간 기억계승작업이라고나 할까. 이제 4·3 미체험세대가 4·3을 보편화시키고
국내화, 세계화시켜야 한다. 특히 청년세대의 4·3 탐험을 기대한다.”
작가가 1978년 「순이삼촌」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진 제주 4·3을 처음 만났다.
그 독보적 인 가치와 의의 못지않게, 제주 출신이 아니라면 ‘삼촌’이라는 호칭에 담긴
제주 문화 또한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기억 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또한 「순이삼촌」의 존재 가치가 아닐 까 싶다.
그런 만큼 제주어(語)에 대한 고민이 가볍지 않았을 것 같다.
“「순이삼촌」이 처음 나왔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제주 에서는 여성에게도 삼촌이라는 호칭을 쓰느냐,
진짜 삼촌이 아닌데도 삼촌이라 부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작지만 호칭에 담긴 제주의 문화, 언어생활의 일면을 보여준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사실 제주 출신 작가에게 제주어(語)는 딜레마다. 보다 풍부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제주어(語)를 많이 쓰자니 소통이 어려워지고 독자들과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일일이 주석을 달자니 흐름이나 분위기를 해치게 되고, 그렇다고 아예 표준어로 쓰자니 영 분위기가 안 살고...
내용과 뜻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주어(語)를 절제하고 표준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적절한 수위 조절, 균형이 필요하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도 여전히 고민이 많았다. 제주 출신 작가의 숙명이다. 때로는 한계로 느껴지기도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귀향(歸鄕)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밝혀왔던터라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백조의 노래’를 마친 작가의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1961년 스무 살, 제주를 떠났다. 그러나 몸만 상륙했을 뿐 여태껏 정신은 상륙하지 못한 상태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줄곧 암중모색 중이었다. 마치 1948년 겨울 그리도 눈이 많이 내려 쌓인 한라산의 깊은 궤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다. 사람 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들 묻는데 나는 이미 무엇을 쓸 것인지 다 생각을 해두었다.(웃음)
콩트가 될지 에세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햇살, 들꽃...자연과 인간에 대해 쓰고 싶다.
자연을 쓰자면 제주 자연이고, 제주 자연을 쓰자면 제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돌아올 시간을 준비해서 실천하겠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4·3소설 『제주도우다』의 작가 "
글 현기영(작가)
글자 수 70만자, 200자 원고지 3,500매, 세 권짜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창비)로 세상에 ‘백조의 노래’를 선사한 작가 현기영 선생.
가장 먼저 고향에서 출간 기념 북토크를 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선생을 지난 7월 8일 제주문학관에서 만났다.
그동안 눈썹과 수염, 머리칼이 좀 더 흰빛을 더 했을뿐 따스우면서도 형형한 눈빛과 조금도 서두르거나 힘들이지 않고
옛이야기 들려주듯 조단조 단 이어가는 말투는 여전하다. 4~5년 산고 끝에 나온 소설이라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에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4·3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다.”고 말문을 연다.
자연스럽게 그 사연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 “그간 중단편으로 4·3은 꽤 써왔으나 장편이 없었다. 언젠가는 4·3을 장편으로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배들의 몫으로 넘기고 나는 그만 쓰고 싶었다. 4·3을 벗어나 소위 보편주의 문학이랄까, 순(純)문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악몽을 꾸면서 다시 4·3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게도 4·3영령들이 내가 예전에
「순이삼촌」으로 정보기관에서 받았던 고문 방식 그대로 날 고문하는 악몽이었다.
‘아, 아직 벗어날 수 없구나, 제대로 진혼곡을 불러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4·3영령들께 바치는 공물(貢物)이자 진혼곡 (鎭魂曲)인 셈이다.”
위무가 필요한 대상이 어찌 이들뿐이었으랴. 3만 원혼을 진혼하는 것만큼이나 작가가 절실하고
절박하게 위무하고 싶었던 대상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살아 있는 죽은 자”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진혼곡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읽어 주기를 바랄까?
- “『제주도우다』는 4·3을 총체적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사실 4·3은 ‘수난’이면서 ‘항쟁’이기도 하다.
내가 써온 중단편이 주로 4·3의 ‘수난’을 다룬 것이었기 때문에 장편에서는 ‘항쟁’을 다루기 위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역사가는 사실(fact)에 기반한 인과관계로서, 이성적으로 4·3을 이해하겠지만
문학가는 사실(fact)을 진실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가에게 4·3은 3만 명이 희생당한 사건이지만
문학가는 4·3을 3만명의 생명이 스러진 3만 개의 사건, 3만 개의 개개인의 이야기로 본다.
문학가가 추구하는 것은 나열된 사실(fact)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다.
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방 속에서 거대한 코끼리를 만지는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다.
독자들도 그런 느낌으로 4·3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면서, 천천히 읽어주길 바란다.”
4·3의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마 젊은 세대를 향한 부탁은 아닐지.
소설 속에서 안창세 노인은 정부길 선생이 행방불명 되기 전 ‘살아 남아서 좋은 글을 쓰라’며
건네준 만년 필을 손녀 부부에게 전해준다. 세대전승의 상징인 셈이다.
어쩌 면 우리 모두에게 『제주도우다』 자체가 ‘만년필’은 아닐지.
“그렇다.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가 가장 강력하게 드 러나는 장치가 ‘만년필’일 것이다.
세대를 이어 기억이 전승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만년필에 담았다. 손녀 부부를 등장시킨 것도 이 소설의 전략이다.
조손(祖孫)간 기억계승작업이라고나 할까. 이제 4·3 미체험세대가 4·3을 보편화시키고
국내화, 세계화시켜야 한다. 특히 청년세대의 4·3 탐험을 기대한다.”
작가가 1978년 「순이삼촌」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진 제주 4·3을 처음 만났다.
그 독보적 인 가치와 의의 못지않게, 제주 출신이 아니라면 ‘삼촌’이라는 호칭에 담긴
제주 문화 또한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기억 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또한 「순이삼촌」의 존재 가치가 아닐 까 싶다.
그런 만큼 제주어(語)에 대한 고민이 가볍지 않았을 것 같다.
“「순이삼촌」이 처음 나왔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제주 에서는 여성에게도 삼촌이라는 호칭을 쓰느냐,
진짜 삼촌이 아닌데도 삼촌이라 부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작지만 호칭에 담긴 제주의 문화, 언어생활의 일면을 보여준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사실 제주 출신 작가에게 제주어(語)는 딜레마다. 보다 풍부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제주어(語)를 많이 쓰자니 소통이 어려워지고 독자들과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일일이 주석을 달자니 흐름이나 분위기를 해치게 되고, 그렇다고 아예 표준어로 쓰자니 영 분위기가 안 살고...
내용과 뜻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주어(語)를 절제하고 표준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적절한 수위 조절, 균형이 필요하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도 여전히 고민이 많았다. 제주 출신 작가의 숙명이다. 때로는 한계로 느껴지기도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귀향(歸鄕)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밝혀왔던터라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백조의 노래’를 마친 작가의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1961년 스무 살, 제주를 떠났다. 그러나 몸만 상륙했을 뿐 여태껏 정신은 상륙하지 못한 상태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줄곧 암중모색 중이었다. 마치 1948년 겨울 그리도 눈이 많이 내려 쌓인 한라산의 깊은 궤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다. 사람 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들 묻는데 나는 이미 무엇을 쓸 것인지 다 생각을 해두었다.(웃음)
콩트가 될지 에세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햇살, 들꽃...자연과 인간에 대해 쓰고 싶다.
자연을 쓰자면 제주 자연이고, 제주 자연을 쓰자면 제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돌아올 시간을 준비해서 실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