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Vol.84 제주성을 구현한 작가들 ①김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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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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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기획팀
- 작성일
- 2023-12-29 16: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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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본 내용은 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겨울호에 게재됐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사라져가는 제주다운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절절한 붓질 "
글 박경훈(작가)
[ 그림 잘 그리는 아이, 김택화 ]
1940년 김택화 화백은 제주시 노형리에서 태어났다. 노형리는 지금은 제주시 신시가지 최고 중심지이지만,
당시에는 제주읍 외곽의 중산간 마을이었다. 노형리는 4·3 당시 제주도 전체 마을 중 4·3 전 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기도 했다.
(소설 『순이삼촌』으로 유명한 현기영 작가도 이 마을 출신이다)
4·3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노형리를 떠나 제주읍 용담2동 먹돌새기 마을로 소개(疏開)된
그는 북국민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면서 성내에서 성장한다. 여전히 4·3사건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6·25가 터지면서 제주에는 15만여 명의 피난민이 들이닥친다.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 시기에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스승 홍종명과의 만남이다.
수많은 피난 행렬 중에 예술가들도 대거 입도하게 되 는데, 그들 중 몇몇은 훗날 한국예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 중에는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끈 서양 화가 홍종명도 있었다.
홍종명은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제주시 칠성로에 ‘미술사’라는 작은 화실을 여는데,
강태석·현승북과 함께 김택화는 이때 그의 제자가 된다. 어릴적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던
소년의 재능은 홍종명에 의해 제대로 발굴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5월 들어 홍종명은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버린다. 스승을 잃은 제자는 안타까움에 떨었지만,
그 역시 곧 이어 상경한다. 서울에서 큰 형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서울 동북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도에 홍익대학교와 서울 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전국 고교생 미술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은 김택화는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재학시절부 터 소위 ‘잘 나가는 미술학도’로 주목받는다. 마치 물 만난 오리처럼 한 껏 재능을 뽐내면서
당시 청년 작가 들의 트렌드였던 추상미술에 경도되어 한국 최초의 추상화 그룹인 <오리진>의 창립회원으로도 참여한다.
하지만, 장래가 총망되던 그는 1965년 졸업과 함께 잠시 고향을 찾는데,
이 시기 다시 만난 제주의 초가와 섬의 풍경들에 매료되어 상경을 포기하고 제주에 남아 버린다.
동시에 그가 학부 시절 내내 골몰했던 추상화를 버리고 스케치북과 캔버스를 들고 온 섬을 돌면서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40년 동안 계속된 그의 이 ‘짓’은 생명의 불꽃이 꺼지고서야 멈추었다. (그는 “예술 은 그저 하나의 ‘짓’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바르비종파 화가를 닮은 김택화의 그림들 ]
김택화는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 화가들을 닮았다.
재능이 충만한 제주 출신 유학생 김택화에게 서울은 더이상 자신이 바라던 도시가 아니었던 듯하다.
학부 내내 추구했던 추상화를 일거에 버리고, 구상회화로, 풍경화로 화풍을 바꾼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초가가 아직 남아 있는 제주섬의 풍광이었다.
그는 천생 섬 놈이고 촌놈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때 그는 비로소 제주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던 것이리라.
바르비종은 프랑스 파리에서 48km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 숲을 낀 작은 마을을 말한다.
이 마 을은 일명 ‘화가들의 마을(Le Villagedes Peintres)’로 불렸는데,
마을 인근의 자연경관에 매료된 파리의 화가들이 하나 둘 찾아들면서
1830년~60년 경에는 80여 명의 화가가 정착한 데서 붙여 진 이름이다.
대표적인 작가는 루소, 밀레, 코로, 도비니, 자크 등 유럽의 화가들로
중고등학교 미술책에 자주 등장한 덕에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이들이다.
당시 프랑스는 갓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목가적인 농촌이 잠식되어가고,
그 도시로 인구집중이 본격화하면서 전통적인 농촌은 피폐해져 갔다.
1800년대 내내 강력한 전염병 콜레라가 유럽을 덮친다. 3차 콜레라 팬데믹으로
파리에서만 2만 여명이 죽어 나가자 파리의 화가들은 바르비종으로 본격 이주 정착한다.
이들은 아직은 중세의 목가적인 자연경관이 남아 있는 퐁텐블로숲과 바르비종 마을의 풍광들,
그 속에 얽혀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으로 하는 회화를 즐겨 그렸다.
그들에게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곧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존재한다.
아직은 남아 있는 사라져가는 것들 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이를 화폭으로 남기게 한 것이다.
이들을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라고 부른다. 루소와 밀레는 이곳에서 생을 마친다. 김택화 역시 이들의 마음과 같았을까.
“제주풍광, 바람, 오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조형이어서 초가에 애착이 가요. 그저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그래서 남다른 연민이 있어요.”라는 생전 그 의 말을 통해 그가 추상화를 버리고
제주풍경을 자기 회화작업의 주조로 잡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 다.
루소나 밀레 등이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에 바르비종을 찾았듯이,
김택화 역시 새마을 운동 으로 제주의 원풍경이 훼손당하기 직전 제주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도시화, 관 광화 되기 전 제주의 원풍경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그래서였을까? 제주 풍경을 집요하게 오 랫동안 그려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본의 폭주가 시작되고 그 폭주가 낳은 난개발의 부조화가
제주의 원풍경을 지워나가던 섬 곳곳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생 각해본다.
그가 즐겨 그렸던 풍경의 대부분은 이제 만날 수 없다. 특히 섬의 오랜 역사 속에 주민들이 조형 해낸
제주 전근대의 전형적인 마을들은 이제 그의 화폭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뿐이이다.
어쩌면 그는 제주의 원풍경의 마지막 아키비스트였을지도 모른다.
[ 현무암을 닮은 블랙이 조율하는 인상파풍의 풍경화 ]
그의 작품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그의 작품들은 소위 구상회화에 속한다. 구상화는 기본이 인물, 정물, 풍경화다.
이중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풍경화다. 풍경화는 사실 구상회화에서 가장 흔한 장르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미술사상 산수화부터 풍경은 중요한 소재였으며, 양화( 洋 畫 )가 도입 된 이후로도 풍경화는 구상회화의 중심이었다.
그런 고로 풍경화는 전문화가에게든 취미작가에 게든 가장 널리 사랑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이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풍경화 가의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김택화의 풍경화가 독특한 것은 왜일까?
그의 작 품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많이 그려졌기에 외광(外光) 아래서의 작업의 특징이 많이 드러난다.
현 장감 있는 빠른 붓질로 포착해낸 이미지들은 그만의 조형감각으로 적절히 묘사되기에,
화실에서 그리는 작업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집안에 걸어놓기 좋은 풍경화, 소위 예쁜 그림과는 차이 가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19세기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처럼 현장의 조형미를 담고 있 기도 하다.
인상파는 19세기 유럽에서 발흥해 미술사상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요한 화파다.
미술교과서를 통해 가장 많이 소개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정규고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거의 인상파에 대해서는 일 종의 친근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바르비종화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롭게 성장 했던 이들은 바르비종 화가들처럼 외광파(外光波)라 해서 야외에서 작업했다.
그들의 작품은 자연 그대로를 넘어, 빛과 색채에 탐닉하면서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내는데, 서양미술사에서는 이를 현 대미술의 시작으로 본다.
김택화 역시 야생 실사를 즐겼다. 야외스케치는 일상이었고, 특히 말년에는 제자들과 정기적으 로 야생 실사를 하기도 했다.
야외에서 실사한다는 것은 외광 아래서 색채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 다. 외광에서는 대기의 상태가 색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시시각각 변하 는 햇빛의 변화와 그에 따른 대기의 상태에서 오는 색채에 열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택화의 작품들 역시 이러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외광 아래서 작업하던 그에게 당연한 것이 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검정색을 과감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 분 검정색을 배제한 채 색의 보색대비 등을 통해 명암을 표현한데 반해,
김택화는 검정색을 필요한 곳에 과감하게 사용했다는 점이 그들과의 큰 차이다.
그가 검정색을 사용하게 된 것은 제주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무암 때문이다.
육지부와 달리 화산섬인 제주에서 돌은 ‘시커멓다’는 것이 기본 색 감각이다.
실제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쳐진 4월 의 유채밭은 강렬한 색채대비를 이룬다.
흑룡만리로 불리는 제주돌담은 제주의 마을을 끼고 곳곳 에 산재해 있다.
육지부의 풍경화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색채의 대비가 제주에선 기본적인 풍경의 색채인 것이다.
특히 마을을 벗어나 밭담이 두드러진 경작지대에 들어서면 모든 색은 돌담의 블랙 으로 구획된다. 마치 조각보의 경계선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풍경화 속 블랙은 현무암이 빚은 색이기도 하다. 마치 현무암의 섬이 만든 풍경을 현무암의 색으로 그려내듯 말이다.
수많은 제주의 풍경화 중에 그의 그림은 그래서인지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현장실사를 통해 제주 풍경에서 얻은, 또는 그가 발견한 제주의 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회화에 있어서 제주성(濟州 性)을 구현한 또 하나의 작가라 부를 만하다.
[ 전업작가 김택화 ]
제주에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제주의 작가 중 전업으로 생활하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그중에서 서울의 화상 과 거래하는 소위 화랑가에서 팔리는 작가가 아니라,
제주의 지역 내에서만 작품을 팔고 살 수 있는 작가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미술시장 자체가 부재하다고 할 만한 제주에서 그는 평생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다.
다른 수입이 있다면, 젊은 날 잠깐의 미술 교사 시절 월급과 이후 제주대 시간강사로 들어오던 약간의 수입이 있었을 뿐이다.
작품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을 영위한 경우는 아마도 전무후무하다고 할 것 이다.
어렵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고 화업을 이어갔던 그에게 같은 작가라면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도 제주대학교병원에 가보면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이 여기에 걸리게 된 여정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소위 제주대병원의 전신인 삼도2동에 있던 제주도립병원 시절,
당시 안목 있는 병원장이 환자들을 위해 구입하여 복도에 전시했던 작품들이다.
그 덕에 그대로 제주대병원으로 승계되어 그의 몇몇 작품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원에 들르는 독자들은 반드시 한번 그의 작품을 찾아 보길 권한다.
거기 걸린 그림 한 점 한 점이 제주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던 김택화 화백의 생을 이어준 흔적임을 생각하면서….’
[ 김택화 제주 풍경의 미덕 ]
원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원래의 풍경일진대, 풍경에 원래의 것이 있을까?
물론 자연 경관은 인위적인 힘을 가해 변형하지 않는한 원풍경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마을은 늘 변화하고 변형된다. 그렇기에 이는 정태적인 표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용어가 와 닿는 것은 장기지속의 경관은 원풍경이라 부를 만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원풍경, 그러니까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제주섬의 풍경은 사실, 전근대부터 이어져 온 장기지속의 풍경 이기도 하다.
구한말이나, 왜정 때나, 해방공간을 거쳐 4 ·3을 지나서도 초가와 돌담을 기반으로 하는 원풍경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제주의 초가는 제주섬에서 만들어진 인문적 조형물이다.
태풍의 길목에 있는 제주섬은 풍재(風災) 수재(水災)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섬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집이 제주 초가다.
병풍 같은 한라산과 그 아래 옹기종기 삼백예순 여개의 오름 자락 아래,
그 오름을 닮은 초가들이 어깨를 맞대고,
삼삼오오 모여들어 돌담을 둘러치고 올레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제주의 마을은,
길게는 몇백년 이상 이어져 온 제주의 원풍경인 셈이다.
바로 김택화가 사랑한 그 풍경이다.
김택화는 귀향한 1965년부터 캔버스에 제주 풍경을 담기 시작했으니,
그가 세상을 등진 2006년 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제주의 원풍경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작가로 입문한 후 전 생애를 그는 제주의 원풍경과 함께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사실, 제주개발의 광풍이 온 섬에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70년대부터 본격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제주의 원풍경을 가장 많이 훼손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새마을 운동은
그 노랫말처럼 제주의 통시를 없앴고, 초가집을 없앴고, 마을길을 변형 시켰다.
관광과 개발의 미명 아래, 그가 사랑했던 초가는 사라지고, 마을길은 넓혀졌고, 새로운 찻길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자본의 욕망은 속도의 욕망으로 바뀌어 1차선 왕복도로는 2차선으로, 3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제주의 원풍경은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무분별한 난개발은 경관 사유화의 길을 터 소위 목 좋은 곳은 외지 자본이 점령하고,
심지어 마을 안까지 이주민들이 지은 2,3층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울담’과 ‘올레’로 정착되었던, 개체와 공동체의 조화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주민들의 프라이버시는 자본의 욕망 앞에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각성한 저개발’이라는 제주의 원풍경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제주대 객원교수로 와서
제주를 필드로 박사논문을 썼던 미국인 데이비드 네메스(David J. Nemeth)가 창안한 개념이다.
우리는 가난의 상징으로 보았던 제주의 전근대 풍경이,
그에게는 과도한 개발의 욕망이 절제된 신유가사상이 남긴 문화경관이라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서구 자본주의가 가지 않았던 길의 미덕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2013년 30여년 만에 제주를 다시 찾은 네메스는
“제주 관광이 어리석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근시안적인 추진 전략으로 인해 번잡함의 굴레로 떨어졌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제주의 원풍경에는 서구에서는 직조할 수 없는 제주섬만의 독특한 문화경관이 있었음을 일찍부터 간파했던 그의 소회였다.
김택화의 그림에는 바로 이 네메스가 안타깝게 여겼던 제주 원풍경의 끝자락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소멸해버린, 아직 자본의 욕망이 이 섬을 분탕질 치기 전의 가난했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누대에 걸쳐 섬의 풍경을 직조했던 순박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바다와 하늘, 오름과 한라산 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바르비종의 화가들을 거론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비종의 화가들이 풍경을 대하던 태도,
네메스가 얘기했던 가지 않아도 될 뻔했던 길을 끝내 가고야만
개발 드라이브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의 붓질 자국에는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풍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제주의 풍경을 그린 화가들은 많다. 하지만, 김택화의 시선과 붓질이 만들어 낸 제주 풍경은 멋진 풍광을 넘어,
전근대부터 이어온 장기지속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어, 더욱 특별하다.
제주성(濟州性)이란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가 ‘제주성’에 도달한 앞자리의 화가중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더 없이 독특하고 소중하다.
삶과 문화 겨울호(제84호)는 재단 홈페이지, 제주문화포털 제주인놀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산지천갤러리 방문 시 무료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
" 사라져가는 제주다운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절절한 붓질 "
글 박경훈(작가)
[ 그림 잘 그리는 아이, 김택화 ]
1940년 김택화 화백은 제주시 노형리에서 태어났다. 노형리는 지금은 제주시 신시가지 최고 중심지이지만,
당시에는 제주읍 외곽의 중산간 마을이었다. 노형리는 4·3 당시 제주도 전체 마을 중 4·3 전 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기도 했다.
(소설 『순이삼촌』으로 유명한 현기영 작가도 이 마을 출신이다)
4·3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노형리를 떠나 제주읍 용담2동 먹돌새기 마을로 소개(疏開)된
그는 북국민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면서 성내에서 성장한다. 여전히 4·3사건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6·25가 터지면서 제주에는 15만여 명의 피난민이 들이닥친다.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 시기에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스승 홍종명과의 만남이다.
수많은 피난 행렬 중에 예술가들도 대거 입도하게 되 는데, 그들 중 몇몇은 훗날 한국예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 중에는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끈 서양 화가 홍종명도 있었다.
홍종명은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제주시 칠성로에 ‘미술사’라는 작은 화실을 여는데,
강태석·현승북과 함께 김택화는 이때 그의 제자가 된다. 어릴적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던
소년의 재능은 홍종명에 의해 제대로 발굴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5월 들어 홍종명은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버린다. 스승을 잃은 제자는 안타까움에 떨었지만,
그 역시 곧 이어 상경한다. 서울에서 큰 형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서울 동북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도에 홍익대학교와 서울 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전국 고교생 미술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은 김택화는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재학시절부 터 소위 ‘잘 나가는 미술학도’로 주목받는다. 마치 물 만난 오리처럼 한 껏 재능을 뽐내면서
당시 청년 작가 들의 트렌드였던 추상미술에 경도되어 한국 최초의 추상화 그룹인 <오리진>의 창립회원으로도 참여한다.
하지만, 장래가 총망되던 그는 1965년 졸업과 함께 잠시 고향을 찾는데,
이 시기 다시 만난 제주의 초가와 섬의 풍경들에 매료되어 상경을 포기하고 제주에 남아 버린다.
동시에 그가 학부 시절 내내 골몰했던 추상화를 버리고 스케치북과 캔버스를 들고 온 섬을 돌면서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40년 동안 계속된 그의 이 ‘짓’은 생명의 불꽃이 꺼지고서야 멈추었다. (그는 “예술 은 그저 하나의 ‘짓’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바르비종파 화가를 닮은 김택화의 그림들 ]
김택화는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 화가들을 닮았다.
재능이 충만한 제주 출신 유학생 김택화에게 서울은 더이상 자신이 바라던 도시가 아니었던 듯하다.
학부 내내 추구했던 추상화를 일거에 버리고, 구상회화로, 풍경화로 화풍을 바꾼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초가가 아직 남아 있는 제주섬의 풍광이었다.
그는 천생 섬 놈이고 촌놈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때 그는 비로소 제주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던 것이리라.
바르비종은 프랑스 파리에서 48km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 숲을 낀 작은 마을을 말한다.
이 마 을은 일명 ‘화가들의 마을(Le Villagedes Peintres)’로 불렸는데,
마을 인근의 자연경관에 매료된 파리의 화가들이 하나 둘 찾아들면서
1830년~60년 경에는 80여 명의 화가가 정착한 데서 붙여 진 이름이다.
대표적인 작가는 루소, 밀레, 코로, 도비니, 자크 등 유럽의 화가들로
중고등학교 미술책에 자주 등장한 덕에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이들이다.
당시 프랑스는 갓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목가적인 농촌이 잠식되어가고,
그 도시로 인구집중이 본격화하면서 전통적인 농촌은 피폐해져 갔다.
1800년대 내내 강력한 전염병 콜레라가 유럽을 덮친다. 3차 콜레라 팬데믹으로
파리에서만 2만 여명이 죽어 나가자 파리의 화가들은 바르비종으로 본격 이주 정착한다.
이들은 아직은 중세의 목가적인 자연경관이 남아 있는 퐁텐블로숲과 바르비종 마을의 풍광들,
그 속에 얽혀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으로 하는 회화를 즐겨 그렸다.
그들에게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곧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존재한다.
아직은 남아 있는 사라져가는 것들 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이를 화폭으로 남기게 한 것이다.
이들을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라고 부른다. 루소와 밀레는 이곳에서 생을 마친다. 김택화 역시 이들의 마음과 같았을까.
“제주풍광, 바람, 오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조형이어서 초가에 애착이 가요. 그저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그래서 남다른 연민이 있어요.”라는 생전 그 의 말을 통해 그가 추상화를 버리고
제주풍경을 자기 회화작업의 주조로 잡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 다.
루소나 밀레 등이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에 바르비종을 찾았듯이,
김택화 역시 새마을 운동 으로 제주의 원풍경이 훼손당하기 직전 제주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도시화, 관 광화 되기 전 제주의 원풍경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그래서였을까? 제주 풍경을 집요하게 오 랫동안 그려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본의 폭주가 시작되고 그 폭주가 낳은 난개발의 부조화가
제주의 원풍경을 지워나가던 섬 곳곳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생 각해본다.
그가 즐겨 그렸던 풍경의 대부분은 이제 만날 수 없다. 특히 섬의 오랜 역사 속에 주민들이 조형 해낸
제주 전근대의 전형적인 마을들은 이제 그의 화폭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뿐이이다.
어쩌면 그는 제주의 원풍경의 마지막 아키비스트였을지도 모른다.
[ 현무암을 닮은 블랙이 조율하는 인상파풍의 풍경화 ]
그의 작품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그의 작품들은 소위 구상회화에 속한다. 구상화는 기본이 인물, 정물, 풍경화다.
이중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풍경화다. 풍경화는 사실 구상회화에서 가장 흔한 장르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미술사상 산수화부터 풍경은 중요한 소재였으며, 양화( 洋 畫 )가 도입 된 이후로도 풍경화는 구상회화의 중심이었다.
그런 고로 풍경화는 전문화가에게든 취미작가에 게든 가장 널리 사랑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이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풍경화 가의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김택화의 풍경화가 독특한 것은 왜일까?
그의 작 품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많이 그려졌기에 외광(外光) 아래서의 작업의 특징이 많이 드러난다.
현 장감 있는 빠른 붓질로 포착해낸 이미지들은 그만의 조형감각으로 적절히 묘사되기에,
화실에서 그리는 작업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집안에 걸어놓기 좋은 풍경화, 소위 예쁜 그림과는 차이 가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19세기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처럼 현장의 조형미를 담고 있 기도 하다.
인상파는 19세기 유럽에서 발흥해 미술사상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요한 화파다.
미술교과서를 통해 가장 많이 소개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정규고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거의 인상파에 대해서는 일 종의 친근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바르비종화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롭게 성장 했던 이들은 바르비종 화가들처럼 외광파(外光波)라 해서 야외에서 작업했다.
그들의 작품은 자연 그대로를 넘어, 빛과 색채에 탐닉하면서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내는데, 서양미술사에서는 이를 현 대미술의 시작으로 본다.
김택화 역시 야생 실사를 즐겼다. 야외스케치는 일상이었고, 특히 말년에는 제자들과 정기적으 로 야생 실사를 하기도 했다.
야외에서 실사한다는 것은 외광 아래서 색채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 다. 외광에서는 대기의 상태가 색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시시각각 변하 는 햇빛의 변화와 그에 따른 대기의 상태에서 오는 색채에 열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택화의 작품들 역시 이러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외광 아래서 작업하던 그에게 당연한 것이 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검정색을 과감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 분 검정색을 배제한 채 색의 보색대비 등을 통해 명암을 표현한데 반해,
김택화는 검정색을 필요한 곳에 과감하게 사용했다는 점이 그들과의 큰 차이다.
그가 검정색을 사용하게 된 것은 제주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무암 때문이다.
육지부와 달리 화산섬인 제주에서 돌은 ‘시커멓다’는 것이 기본 색 감각이다.
실제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쳐진 4월 의 유채밭은 강렬한 색채대비를 이룬다.
흑룡만리로 불리는 제주돌담은 제주의 마을을 끼고 곳곳 에 산재해 있다.
육지부의 풍경화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색채의 대비가 제주에선 기본적인 풍경의 색채인 것이다.
특히 마을을 벗어나 밭담이 두드러진 경작지대에 들어서면 모든 색은 돌담의 블랙 으로 구획된다. 마치 조각보의 경계선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풍경화 속 블랙은 현무암이 빚은 색이기도 하다. 마치 현무암의 섬이 만든 풍경을 현무암의 색으로 그려내듯 말이다.
수많은 제주의 풍경화 중에 그의 그림은 그래서인지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현장실사를 통해 제주 풍경에서 얻은, 또는 그가 발견한 제주의 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회화에 있어서 제주성(濟州 性)을 구현한 또 하나의 작가라 부를 만하다.
[ 전업작가 김택화 ]
제주에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제주의 작가 중 전업으로 생활하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그중에서 서울의 화상 과 거래하는 소위 화랑가에서 팔리는 작가가 아니라,
제주의 지역 내에서만 작품을 팔고 살 수 있는 작가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미술시장 자체가 부재하다고 할 만한 제주에서 그는 평생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다.
다른 수입이 있다면, 젊은 날 잠깐의 미술 교사 시절 월급과 이후 제주대 시간강사로 들어오던 약간의 수입이 있었을 뿐이다.
작품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을 영위한 경우는 아마도 전무후무하다고 할 것 이다.
어렵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고 화업을 이어갔던 그에게 같은 작가라면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도 제주대학교병원에 가보면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이 여기에 걸리게 된 여정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소위 제주대병원의 전신인 삼도2동에 있던 제주도립병원 시절,
당시 안목 있는 병원장이 환자들을 위해 구입하여 복도에 전시했던 작품들이다.
그 덕에 그대로 제주대병원으로 승계되어 그의 몇몇 작품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원에 들르는 독자들은 반드시 한번 그의 작품을 찾아 보길 권한다.
거기 걸린 그림 한 점 한 점이 제주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던 김택화 화백의 생을 이어준 흔적임을 생각하면서….’
[ 김택화 제주 풍경의 미덕 ]
원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원래의 풍경일진대, 풍경에 원래의 것이 있을까?
물론 자연 경관은 인위적인 힘을 가해 변형하지 않는한 원풍경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마을은 늘 변화하고 변형된다. 그렇기에 이는 정태적인 표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용어가 와 닿는 것은 장기지속의 경관은 원풍경이라 부를 만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원풍경, 그러니까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제주섬의 풍경은 사실, 전근대부터 이어져 온 장기지속의 풍경 이기도 하다.
구한말이나, 왜정 때나, 해방공간을 거쳐 4 ·3을 지나서도 초가와 돌담을 기반으로 하는 원풍경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제주의 초가는 제주섬에서 만들어진 인문적 조형물이다.
태풍의 길목에 있는 제주섬은 풍재(風災) 수재(水災)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섬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집이 제주 초가다.
병풍 같은 한라산과 그 아래 옹기종기 삼백예순 여개의 오름 자락 아래,
그 오름을 닮은 초가들이 어깨를 맞대고,
삼삼오오 모여들어 돌담을 둘러치고 올레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제주의 마을은,
길게는 몇백년 이상 이어져 온 제주의 원풍경인 셈이다.
바로 김택화가 사랑한 그 풍경이다.
김택화는 귀향한 1965년부터 캔버스에 제주 풍경을 담기 시작했으니,
그가 세상을 등진 2006년 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제주의 원풍경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작가로 입문한 후 전 생애를 그는 제주의 원풍경과 함께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사실, 제주개발의 광풍이 온 섬에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70년대부터 본격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제주의 원풍경을 가장 많이 훼손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새마을 운동은
그 노랫말처럼 제주의 통시를 없앴고, 초가집을 없앴고, 마을길을 변형 시켰다.
관광과 개발의 미명 아래, 그가 사랑했던 초가는 사라지고, 마을길은 넓혀졌고, 새로운 찻길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자본의 욕망은 속도의 욕망으로 바뀌어 1차선 왕복도로는 2차선으로, 3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제주의 원풍경은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무분별한 난개발은 경관 사유화의 길을 터 소위 목 좋은 곳은 외지 자본이 점령하고,
심지어 마을 안까지 이주민들이 지은 2,3층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울담’과 ‘올레’로 정착되었던, 개체와 공동체의 조화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주민들의 프라이버시는 자본의 욕망 앞에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각성한 저개발’이라는 제주의 원풍경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제주대 객원교수로 와서
제주를 필드로 박사논문을 썼던 미국인 데이비드 네메스(David J. Nemeth)가 창안한 개념이다.
우리는 가난의 상징으로 보았던 제주의 전근대 풍경이,
그에게는 과도한 개발의 욕망이 절제된 신유가사상이 남긴 문화경관이라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서구 자본주의가 가지 않았던 길의 미덕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2013년 30여년 만에 제주를 다시 찾은 네메스는
“제주 관광이 어리석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근시안적인 추진 전략으로 인해 번잡함의 굴레로 떨어졌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제주의 원풍경에는 서구에서는 직조할 수 없는 제주섬만의 독특한 문화경관이 있었음을 일찍부터 간파했던 그의 소회였다.
김택화의 그림에는 바로 이 네메스가 안타깝게 여겼던 제주 원풍경의 끝자락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소멸해버린, 아직 자본의 욕망이 이 섬을 분탕질 치기 전의 가난했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누대에 걸쳐 섬의 풍경을 직조했던 순박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바다와 하늘, 오름과 한라산 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바르비종의 화가들을 거론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비종의 화가들이 풍경을 대하던 태도,
네메스가 얘기했던 가지 않아도 될 뻔했던 길을 끝내 가고야만
개발 드라이브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의 붓질 자국에는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풍경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제주의 풍경을 그린 화가들은 많다. 하지만, 김택화의 시선과 붓질이 만들어 낸 제주 풍경은 멋진 풍광을 넘어,
전근대부터 이어온 장기지속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어, 더욱 특별하다.
제주성(濟州性)이란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가 ‘제주성’에 도달한 앞자리의 화가중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더 없이 독특하고 소중하다.